다관


 물도 잘 나오지 않는 다관을  팔아놓고는 누군가 출수가 왜 안 되냐고 물어오면 화병이라고  웃으며 대답을 하다니  참 뻔뻔했다. 

 유머의 이해와 공부하는 사람에게 기회의 시간을 준 그들이 있었기에  지금까지 도자작업을 하면서 살 수 있었다.  고마움과 동시에 이 기회는 다시 누군가에게 제공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. 


2005년 작업실을 만들고 ‘결’이라는 주제로 첫 전시를 열었다.

결은 스승에게서 왔다. 

도제시절 스승에게 얼에 대해 물었다.  


‘아버지의 얼굴에서 아들의 얼굴로 그 아들이 자라서 다시 아들에게로

얼굴을 통해 정신이 전해지며 최초의 아버지의 정신은 그 아들에  아들의 얼굴에 남아 함께 존재하는  것이다.‘ 


 나는 수 백 만년 함축된 자연의  형상적 표현으로 ‘결’을 선택하였다. 

 흐르고 맺히고 다시 풀리고 자라고 다시 뭉치고 풀리고..

나무나 바위의 결을 천천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표현되는 것들.

 자라는 듯 하지만 죽고, 죽은 듯 하지만  다시  자라는 것이 자연이다. 

 

자연의 결을 통해 나는 먼저 아버지의 얼굴을 인정했고 스승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.

 아버지는 내게 인간의 눈을 주셨고 스승은 내게 자연과 삶을 바라보는 눈을 주셨다.

도자가  기술 습득과 숙련의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내게  더 중요했던 것은

 진솔하게 스승의 삶을 바라 보았는가 일지도 모른다. 

 바로 그것이 나의 삶이 될 수도 있기에 말이다. 

완전히 그들의 삶이 내게 스며들고 나의 자정능력이 있는 한 그 삶은 영원할 것이며, 한층 성숙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. 

 반대로 그들의 삶이  완전히  전달되지 않았더라도 조급해 하지 않을 것이다. 왜냐하면 내 아들과 그 누군가가  다시 노력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. 

 

 내가 만든 다관이나 숙우 등이 완전함을 이뤄낼 거라 생각지는 않는다.

부족함의 앎을 알고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.

‘ 물이 나오지 않아요, 뚜껑이 잘 맞지 않아요, 뭐가 작아요,,’

그러한 모든 부족함들이 나를 깨우고, 

 눈 오는 겨울날, 

 난로위 주전자에 김이 나고,

 옛집 할아범이 쓰던 낡은 책상에서

 주전자 흙덩어리를 만지작 거리는 나.

그것이 삶이라는 걸 스스로 알아간다.  

 

 

 그리고 만약에 내가 도자의 대가가 되어 완벽체에 가까운 도자를 마침내 만들 수 있다 하여도 하나쯤은 빼고 만들고 싶다.

 그것이 지금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이 들어올 수 있는 자리 하나쯤은 비워두고 싶다. 


2014년 가을에